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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스토리 시즌2/쿠퍼의 가치 좀 살자

[뽀돌이의 사회문화]생각만해도 아찔한 1980년.....학생운동

요 근래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린 나머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큰일이네요.

그래서 사회적기업관련 글 마지막인데... 잠시 쉬고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글의 내용은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린 

성신여자대학교 홍석률선생님의 최루탄과 화염병, 1980년대 학생운동(2007)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저작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당장 삭제 조치를 하겠으니

선고소 후경고가 아닌

선지적 후경고로 부탁드립니다.




과거 학생운동이 그랬듯(근래에도 그렇지만) 아무리 학생운동이 활발할 지라도 모든 학생들이 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다수를 차지하지도 않았었죠. 일반적인 대학생의 생활을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1960년대 부정선거로 인한 4.19혁명 후 1970년대의 학생운동은 침체기를 맞이했구습니다. 대신 미국에서 들어온 대중음악, 대중문화가 대학생들에 접목되면서 대학문화가 형성됩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학생운동가들은 대학문화와 접목한 운동을 전개하고자 적극 노력하게 되죠. 그래서 김민기, 양희은과 같은 대중음악, 포크송들이 유명세를 탑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은 저작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노래들에 저항성을 부여하여 금지하게 이릅니다. 물론 대학생들은 더욱더 다른 방식으로 대중문화나 민속극을 변형하여 지배계급을 풍자하는 상황을 보였습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의 억압과 탄압, 그리고 일상생활의 감시에 1980년대 대학생은 소수가 운동을 하게 되는데 21세기에 사는 지금의 제 또래 친구들은 그때의 학생운동을 격렬하게 상상하고 있습니다. 아주 크게요. 그래서 보건데 소수의 학생운동가들이 탄압과 감시 속에 더욱 저항심이 강해져 조직이 견고해지고 탄탄하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대중화까지 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죠.


1980년대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의 싹 자체를 잘라 버리려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소규모 비밀 서클을 조직하여 계속 활동했고 시위도 점차 증가 추세에 있었다. 양적 통계만 보더라도 1981년은 43회의 학생시위, 15천여명의 참여자가 있었고 1983년은 143회 시위에 7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학내에 경찰이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 초동단계에 진압되었으며 구호 몇 번 외치다가 모두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시위를 더 하기 위하여 건물 옥상, 베란다에 올라가 고공시위를 벌이거나 심지어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쳤다. 5.18민주항쟁 직후 대학가의 풍경은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으며 점점 더 힘든 조건에서도 투쟁의 논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 학생운동이 표면적으로는 침체기였으나 내면적으로는 훨씬 급진화, 조직화 되는 양상을 보였다(홍석률, 2007).


더욱 견고하게 다져진 학생운동 조직들은 전구환 정권의 탄압 시스템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여기에서 정치일정도 고려 되었죠) 그래서 감시를 외면적으로 풀어보이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학원자유화조치' 입니다. 학원자유화조치는 1983년 문교부가 12월 21일 제적생의 복교 허용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학원(교)내에 있는 경찰 병력이 철수하게 되고 1300여명의 제적학생 중 700여명이 학교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전두환 정권이 이 것을 그냥 놔둔것이 아니겠죠?  정두환정권은 전투경찰제도를 변경하여 징병제를 통해 더욱 늘렸습니다. 전투경찰은 초기에 대간첩작전과 중요시설 경비임무를 주로 맡는 것이었는데 1980년 12월부터는 치안업무를 맡게 할 수 있게 되었죠. 게다가 의무경찰제도까지 신설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가 됩니다. 제적이 풀린 학생들이 더욱더 견고하게 학생운동을 하게 되죠. 그래서 여러 조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서로간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의 저항을 무조건 강압만으로 봉쇄하기도 어려웠으며 정치일정을 고려하여 198312월 학내에 상주하는 경찰력을 철수시키고, 학생운동 관련으로 제적된 학생들을 일부 복학시켰다. 이른바 학원자유화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미 학생운동을 통제할 수 있는 만만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징병제를 통해 전투경찰순경을 대폭 증가시켰다. 19679월 북한의 내남 무력공세가 한창일 때 만들어 놓은 전투경찰제도는 대간첩작전 및 중요시설 경비임무를 주로 맡았으나 198012월 전투경찰이 치안업무도 담당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을 개정하여 시위진압임무에 동원할 수 있도록 인력을 보다 쉽고, 안정적으로 확충해 나갔다. 또한 1983년 의무경찰제도 신설은 전투경찰과 함께 전경대에 배속되어 시위진압임무를 맡았다(홍석률, 2007).



갈등이 심해지면서 서로 간에 폭력적인 행위가 늘어납니다.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하게 되고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들게 됩니다. 누가 말릴세도 없이요. 서로 으르렁 거리며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었죠. 경찰 최루탄은 SY44탄 KM25탄, 뭐 그랬답니다. 1985년 최루탄은 전기점호ㅓㅏ로 로켓탄처럼 날아가는데 다연발로 따다다닥! 나가는 최루탄이 사용된다고 하네요. 그리고1985년 최루탄 사용 수량이 204,481개, 1986년 9월까지는 313,204개로 2년간 쓴 최루탄의 수가 50만개가 넘어가네요. 구리시 인구가 20만이 안되는데... 구리시라면 일년에 한 사람당 한개 이상 맞았겠네요. 그래서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연세대학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 금속성 파편이 뇌 속에 박히는 우울한 일이 있었죠....

 



뭐.. 학생들이라고 잘한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는데 돌은 일반적으로 보도블럭을 깨서 던진다고 합니다. 경찰이 방석모와 방석복을 입긴했지만 보도블럭에 맞으면 장난아닙니다.(맞아본건 아니지만...) 경찰이 숨지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1986년도부터 화염병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화염병은 인화물질을 소주병에 담아 심지를 넣고 마개를 막아서 불을 붙이고 쫘악!!!!! 이것이 던져진 곳은 반경 1m정도 화염이 1~2분정도 지속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행정적 민주주의는 진행됐고 여타 암울한 세대를 지낸 선배님께 경의를 표하며... 후배들도 잘 살아가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