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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실스토리 시즌2/느릿느릿 예쁜 늘보

[남양주] 다산 정약용 생가, 실학 박물관

[남양주] 다산 정약용 생가, 실학 박물관

 

- 정말 추운 어느날, 입김이 푹푹 부는 어느날,
  속세에 찌는 나를 위한 콧바람 쐬기 프로젝트, 차를 타고 가도 추운거 같고 손가락이 시려웠다.

  역사 포스팅을 하겠다고 한 후, 역사에 관련된 포스팅을 많이 못한거 같다.
  거창하게 역사지만, 나름 즐기면서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정말, 어디론가 떠나면 마음이 두근거리지만, 떠나기 까지가 너무 어려워서 망설여 진다.

다산 유적지에 들어가서 처음 보였던 것이 다산 정약용 선생 상 이였다.
다산 정약용님께 감사함을 표시한다고 꾸벅거리면서 인사하는 사진이 있지만,

종아리가 너무 두껍게 나와서 올리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너무 까마득한 옛날)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나주 정씨 재원과 해남윤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은 23살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서 성균관에 들어갔다.
다산은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28살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다.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다산은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하였는데,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옹호하는
성리학만을 신봉하던 보수집권세력인 노론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이때 노론은 다산이 주장하던 성리학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용서치 않았고
서학은 정적을 없애는 빌미로 이용하게 되었다.

다산은 1800년 봄에 낙향하여 당호를 여유당이라 짓고 은둔 하였다. 그 해 여름에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이후 노론은 11살 어린 순조를 옹립하고 정순왕후의 섭정라애 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모든 정적을 제거한 뒤 세도정치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 다산의 나이는 40세로 셋째 형은 약종으로 죽고, 둘째 형은 흑산도로 그리고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되었다.

다산 유적지를 돌아다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실학박물관이 있었다. 그래서 털털털.. 실학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도 도민이면 입장 표를 할인 받아서 들어갈 수 있으니 신분증을 꼭 챙겨야 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보여서 카메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지 말라는 표식이 없었기 때문에 플래시를 터트리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자명종도 보이고..

그.. 유명한 목민심서도 보였다. 백성의 입장에서 관청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경계할 것을 내용으로 쓴 책이다.

별자리도 보였고.

다산 유적지, 실학 박물관, 두물머리에 갔다온 뒤, 집으로 가는길
두물머리에서 유명한 만두를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다.

만두 냄새가 어찌나 나는지. 침이 꼴깍꼴깍.

콧바람 쐬러 또 가야겠다.

 

[출처] 다산 유적지 홈페이지 http://www.nyj.go.kr